막달라 마리아, 예수가 지닌 인간 사랑의 상징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다빈치 코드> |
뉴스앤조이 , 2006-05-25 오전 11:55:33 |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았다. 동명(同名)의 책이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해도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시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과, 2년 전 반(反) 예수적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성서적이라고 착각하며 전 세계 기독교인이 열광했던 기억이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가톨릭,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눈과 마음을 현혹할 때 나는 그런 분위기에 맞서 <멜깁슨, 성서를 모르거나 예수를 모르거나>라는 책까지 쓰면서 보수 기독교의 성서에 대한 무지(無知)와 허약한 문화 감각을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영화 속 예수가 진짜 예수의 참 모습인 양 호들갑을 떨었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할 것이다. 그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빌려 1년 내내 상영하며, 매주 기도회를 열겠다고 했고, 수천 명의 서포터를 모집하여 이 영화의 영구 상영을 시도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런 분위기는 일 년은 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최소한 다음해 수난(고난)절과 부활절에도 이 영화가 등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순진한 오판이었다. 내 판단과는 달리 어떤 일인지 그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년도 못가서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멜깁슨이 조작한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진리는 그렇게 쉽게 단명하지 않는 법이다. 이번에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그들’은 <다빈치 코드>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 영화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 모두를 부인함으로서, 기독교 신앙과 정체성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수천 년 되풀이되는 낡은 죄목을 붙여가며 1인 시위, 영화 보기 반대 운동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아마 몇 주간이 지나 <다빈치 코드> 영화 관객이 수백만에 이르면 어느 한 대형교회에 모여 회개하는 기도회나, ‘다빈치 코드 바로 바로 알기 대회’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주님, 무지한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당신의 이름을 더렵혔나이다’ 울면서 예수도 관심 없는 기도를 해댈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보수 기독교인들의 ‘슬픈 코미디’였다면, 이번에는 정말 ‘가소로운 코미디’가 되고 있다. 잘못된 예수 이미지를 조작한 영화는 극찬하고, 잘못된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꼬집는 영화는 비판하는 한국기독교의 잘못된 자의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보인다. 그 자의식 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죄의식’에 공고한 기초를 두었다면, 이 영화의 비판 뒤에는 ‘기독교의 자기보호본능’이 더욱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영화는 몇 개월 안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이런 기독교의 행태는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박히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영화 하나에 대한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또다시 예수의 정신을 모독하는 해프닝으로 남아 비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픽션(Fiction) 안의 진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다빈치 코드>를 반드시 보기를 적극 권한다. 그것도 ‘영화는 영화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제법 이성적인 척하는 태도를 버리고 지금 이 영화를 통해 이 시대가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고 대면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이야기의 구성과 내용은 픽션이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것은 ‘사실’(Fact)의 반대어지만 그렇다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뜻조차 ‘진실’이 아니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진리가 아닐 수 있고, 사실이 아닌 픽션이어도 그것이 전하는 것은 진리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분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우리는 다시 한 번 ‘사실’과 ‘진실’의 관계를 명료하게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진지하게 봐야 한다. 이 영화의 구성상의 픽션, 내용상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은 수도회나 여러 역사적 인물들과의 잘못된 연관성으로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편집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성서의 정경화가 지닌 문제점, 신앙을 가장한 십자군전쟁의 발발과 전개, 교황들의 권력 싸움, 마녀사냥, 과학자들의 억압 등은 수많은 기독교가 범한 역사적 치부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 영화의 세 가지 미덕 이 영화가 기존 기독교 전통 신학과 신앙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언급하는 것이니까 나까지 부화뇌동하고 하고 싶지 않다. 그 부분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정도의 영화와 소설로 예수 신앙의 변화나 혼돈을 겪고, 심지어는 기독교 신앙을 버릴 정도라면 이미 그들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은 애초에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들의 거부는 거꾸로 그들로 하여금 다양한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 기독교 지도자들로 말미암은 당연한 결과이다. 나는 오히려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이 영화가 가지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반추하는 지점을 나누고 싶다. 그것들이 이 영화가 지향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 수 있어도 적어도 이 영화를 본 기독교인들이 있다면 이런 영화 읽기 또한 신앙의 약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세 가지 차원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첫째, 지난 2000년 동안 지금도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적인 기독교 모습 대한 반성이며, 더욱이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싸움을 어떻게 합리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A.D.313) 이후 1700년 이상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폭력과 전쟁을 자행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가 인류에게 저질렀고, 또 저지르게 만드는 그 뿌리가 어디 있는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그 뿌리는 예수의 신격화에서 찾지만 우리가 숙고해야할 것은 그 하나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 기독교가 현재 세계에서 점점 더 썩 내키지 않는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 찾기에 마음 가게 한다는 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각인시키려 노력한다. 영화는 그들이 성배와 막달라 마리아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그래서 새로운 기독교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기독교를 무너트리는 위험을 감소해서라도 말이다. 예수 신앙의 내용의 뿌리는? 둘째, 이 영화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 신앙의 내용과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냉철하게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기독교가 믿는 예수의 모습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어떤 이들에게는 새삼스럽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랍게 되새기게 한다. 기독교와 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그려낸 예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과 신앙운동을 억압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했던가! 지금도 이 땅에서 수많은 ‘종교재판’이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이 땅의 정치적 해방과 혁명을 지향하는 예수 신앙이 혹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예수 신앙을 향해 자신의 신학적 이해능력의 유치함을 감춘 채 얼마나 많은 ‘돌’을 던지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만 가둬놓고 박제화시킨 교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두 측면이 우리의 신앙 실천 안에서 얼마나 창조적으로 결합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도전이다. ‘예수따름’의 삶에 대한 도전 없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화로 모셔놓은 채 마치 건강한 기독교인 양 교회를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의 예수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가 아니다. <다빈치 코드>를 보고 읽을 때 흥분 정도는 대상화 정도의 비례할 것이다. 즉 그런 예수 대상화가 정도가 심할수록 이 영화에 잘못된 흥분정도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아이가 있었다는 가설은 단지 이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플롯상의 기제일 뿐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태도는 영화 읽기의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이나 그 자손의 유무에 따라 기독교 예수 신앙이 흔들린다면, 그 기독교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종교이고, 그런 기독교인은 자신의 예수 믿음의 허약함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대화 중에 “예수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지금의 신앙이 달라지겠냐?”라는 질문은 하나의 도전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사실 여부에 따라 믿음이 달라질 정도라면 예수의 믿음,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빈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가 지닌 인간 사랑의 상징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라는, 당시로서는 인간의 범주에도 들지 않았던 여인을 부각시키는 것은 하나의 예수 사랑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인간 예수’의 편에 서서 예수의 후손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교회 권력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의 충돌과 음모, 그리고 살인 사건들로 엮어져 있다. 예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보존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진실이며 사랑이라고 믿는 그룹과, 이 사실을 없애는 것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이 교회권력을 존폐가 걸려있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싸움 또한 역사 상 기독교 내부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역사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졌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 존재한 큰 두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두 세력 간의 싸움은-그것이 영화에서처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과 그 자손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지만-이 땅에서 억압받고 고통 받는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이나 혹은 사회의 주변부 민중들을 위한 사랑의 화신으로 비춰지고 있는 예수를 옹호하고 따르는 집단과, 이에 반에 예수를 독점하고, 우상화하고 경직된 신격화함으로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도그마 된 ‘기독교의 예수’로 한정시키려는 집단과의 끊임없는 갈등의 상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창조적 소수자들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창조설을 배반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지금은 민중신학, 해방신학, 종교신학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무시하고 정죄하고 있단 말인가? 이 두 진영의 갈등은 그 형태는 다르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집단이 참 예수를 보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다빈치 코드>는 전자에 손을 들어준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무덤을 찾아내어 앞에 기사처럼 무릎을 꿇는 ‘톰 행커스’ 장면은 거대 교회 권력의 횡포가 수포로 돌아감을 보여줌으로서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예수와 관련된 영화로서 이런 ‘예수의 모습’ ‘소수자’에게 무게를 실어준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는 많은 용기를 발휘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감사한다. 적어도 내게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몸 사랑’을 했고, 또 그녀가 예수의 아이를 낳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대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주제도 아닐 뿐 더러 나의 믿음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아내로서 그려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후손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기성 기독교 권력에서 억압당하는 예수 신앙의 소수자들을 향한 예수 사랑의 상징이다. 우리 시대의 막달라 마리아는 무수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막달라 마리아’는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예수 아기 잉태설의 허황됨에 흥분하거나 쓴웃음을 짓기보다는, 이 두 큰 싸움 속에서 자신은 어떤 예수를 믿을 것이며, 어떤 예수의 믿음을 지닐 것인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 그려진 기독교의 잘못을 보면서 부끄러움과 동시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뉴스앤조이=코리아포커스제휴사) | ||||
| |
|
2006-05-25 오전
11:55:33 © CoreaFocus.com 뉴스앤조이의 다른 기사보기 |
출처 : 코리아포커스
글쓴이 : 코리아포커스 원글보기
메모 :
'Tomorro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LG필립스LCD, 폴란드모듈공장 기공 (0) | 2006.06.16 |
---|---|
PDP모듈 세계 1위, DTV TOP TIER가 눈에 보인다. (0) | 2006.06.08 |
일본에 ‘기러기 아빠’가 없는 이유 (0) | 2006.05.24 |
LGEHS(LG전자 그리스법인)의 놀라운 성공 체험기 (0) | 2006.05.23 |
자기야, 우리 연금저축 먼저 들자 (0) | 2006.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