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21세기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됐다.
흑백 혼혈 출신으로는 최초로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버락 오바마(47.일리노이) 상원의원은 28일(현지시간) 저녁 로키산맥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서부개척 도시 덴버에 있는 미식축구경기장인 인베스코에서 7만5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선 후보 수락연설을 했다.
흑인 대선 후보 탄생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통해 건국한 1776년 이후 232년 만이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미국에 끌려왔던 흑인들이 1863년 1월1일 노예에서 해방된 지 145년 만이며 흑인 남성이 투표권을 부여받은 1869년으로 따지면 139년 만에 처음 있는 역사적인 대(大)사건이다.
또 이날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 꿈이 있어요'(I have a dream) 연설을 한 45주년 기념일이다.
그래서 오바마 연설의 역사적 의미가 더 했다.
◇출생에서 성장까지
오바마는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당시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온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와 캔자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과 사이에서 태어났다.
버락은 아랍어로 `축복받은'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하버드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아들 곁을 떠났다. 그리고 부모는 오바마가 두 살때 이혼했다. 오바마가 아버지를 다시 본 것은 10살 때였고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출신의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하면서 어린 시절 가운데 4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도 파경을 맞았다.
어린 시절 `배리'로 불렸던 오바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있던 호놀룰루로 돌아와 유명한 사립학교인 푸나호우 스쿨에 들어가게 됐다. 인류학자인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다시 가는 바람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오바마와 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정치적인 야심이 가득 찬 학생이었다기 보다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버지는 없었기 때문에 성장환경은 결코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오바마는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통해 털어놓았던 것처럼 청소년시절에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그가 마약까지 접했다는 것은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폭풍과도 같은 갈등이 내적으로는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내적인 갈등과 방황은 그를 미국 최초의 흑인 대선 후보 자리에까지 오게 만든 담금질이었고 토양이 됐다.
그는 기독교도 신자지만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인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그리고 다양한 문화 배경을 지닌 인종들이 섞여 살고 있는 동서양의 접점으로 불리는 하와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웠다.
특히 하와이에서의 청소년기는 문화적인 이해와 관용, 그리고 서로 인정하는 태도를 매우 중시하는 `알로하 정신'을 체득하게 만들어 인종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됐다.
2차 대전 참전 군인 출신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할머니에게서 누구 못지 않은 사랑과 교육을 받은 것도 희망의 싹을 키우며 자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다. 오프라 윈프리가 언급했듯이 그들이 한번 모이면 `미니 UN'이 된다.
오바마는 이런 다문화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을 통해 문화의 충돌로 불리는 세계의 문제를 통합의 가치로 새롭게 풀어낼 수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키워온 셈이다.
◇대학에서 결혼 그리고 정치입문까지
오바마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옥시덴틀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용해오던 배리라는 이름 대신 버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대학에서 반(反) 아파르헤이트(인종차별정책) 집회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인문대학인 옥시덴틀 칼리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야를 넓이기 위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편입학을 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잠시 일자리를 잡았다. 그 때 생부가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고 케냐를 방문했다.
오바마는 케냐에서 돌아온 뒤 시카고 흑인거주 지역에서 도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시카고에서 연봉 1만2천달러를 받고 공동체개발운동 프로젝트를 하면서 오바마는 대학에서 배울 수 없었던 소중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
이 곳에서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갓 뎀 아메리카'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와도 인연이 시작됐다. 라이트 목사는 그의 결혼식 주례를 했을 정도로 가까운 정신적 스승이자 영적 지도자였지만 발언 파문이 계속 확산되면서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의 길을 걸게 됐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도시빈민운동의 경험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후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역환경 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정치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하버드 법대 대학원을 진학, 법학박사를 받고 변호사가 됐다.
하버드 법대 시절에는 법대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이 돼 언론으부터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버드 법대시절 시카고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연수를 하면서 현재 부인이 된 미셸 로빈슨을 처음 만났다.
오바마는 대선 유세 지원을 위해 시카고 대학병원 대외업무 담당 부원장직을 그만 둔 부인 미셸(44)과의 사이에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를 두고 있다.
미셸은 흑인 소방관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법대를 나와 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로, 이번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원하는 각종 유세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선거 초반 오바마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였던 흑인지지표 몰이에 큰 몫을 했다.
◇혜성같이 등장 흑인 최초 대선후보 등극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자 여러 곳에서 몰려오는 일자리 제안이 물리치고 시카고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시카고 대학 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면서 미래를 차근 차근 준비해 나갔다.
처음에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유권자 등록 운동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디디게 됐다.
오바마는 2004년 여름 보스턴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연설을 하기직전만 하더라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주 상원의원 출신의 정치인에 불과했다.
그가 8년전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할 때만 해도 전당대회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플로어 티켓을 구하지 못해 홀 방청석에서 TV를 통해 대회를 지켜봤어야 했고 신용카드의 잔고가 다 떨어져 곤란한 경험까지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오바마는 2004년 전당대회에서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17분짜리 기조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으며 한순간에 미국의 정치 중심무대로 뛰어 올랐다.
그것은 바로 오바마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이었다.
이후 그는 연설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 지지자들을 열광시킨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됐다.
2004년 11월 그는 흑인으로는 미국에서 세 번째 연방 상원의원이 됐고 현재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다.
케리 상원의원은 "오바마는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서 "내가 문을 열어 주었을 수는 있지만 그 문을 통해 걸어나와 무거운 문을 열어 제친 것은 오바바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한파가 몰아치던 2007년 2월10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일리노이 주의 옛 주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우리 세대가 이제 시대적 소명에 답할 때"라면서 대권도전의 출사표를 던졌다.
그가 대선 후보 출마를 선언했던 장소는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전(前) 대통령이 지난 1858년 "내부가 갈라진 집은 서있지 못한다"는 명연설로 흑인노예 해방의 정치투쟁을 시작했던 곳이다.
오바마는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바로 이곳에서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조지프 바이든 상원의원과 함께 처음으로 합동유세를 벌였다.
오바마는 올해 1월 처음으로 시작된 대선후보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최대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꺾고 승기를 잡은 뒤 그 여세를 몰아 슈퍼화요일 승리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선후보 탄생을 일찌감치 예고했었다.
그의 유세장은 록스타의 공연처럼 "Yes, We Can"(예, 우리는 할 수 있어요), "Change We can believe in"(변화, 우리는 믿을 수 있어요)의 구호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오바마가 떠나도 축제처럼 열기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결국 오바마는 지난 6월3일 몬태나와 사우스 다코타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린 5개월간의 경선 레이스에서 승리, 사상 첫 흑인 대통령 도전권을 따냈다.
오바마는 지난 27일 덴버 펩시센터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깜짝 등장한 힐러리의 제안으로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오바마는 오는 11월4일 공화당 대선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미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흑백대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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