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3·15’가 돌아왔다. 당시 항쟁이 가장 치열했다는 마산시 신포동 3·15기념탑에서 마산시청에 이르는 800m의 도로는 지금 우람한 버스들이 질주하고 있다. 이 길은 지금 ‘3·15의거로’로 이름
지어져 있다.
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가 이 길 위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졌다. 한 달 여가 지난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서 떠 오른 열사는 4·19혁명의 ‘핵폭탄’이 됐다. 그리고 46주기를 맞은 지금 이 길에서 김주열은 사라졌다.
14일
오전 11시 당시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장소로 추정되는 마산시 자산동 경남데파트 앞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기자는 근처
김밥전문점으로 들어가 ‘김주열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귀찮다는 주인의 손짓으로 쫓겨났다. 김주열의 이름은 들어봤다던 한 시민도 열사가 이곳에서
숨졌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도로를 오가는 택시기사도 3·15의거로의 내력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각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김주열 열사의 묘소에서는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남원시장과 시의회의장, 지역 국회의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장은 김주열 열사 묘소의 성역화와 생가복원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남원시 김주열열사추모회에 따르면 지난
2004년 전북도지사가 남원에 왔을 때 추모사업회가 묘소 성역화와 생가 복원을 건의한 이후 지난해 전라북도와 국가보훈처가 협의해 국비와
도비·시비를 합해 전부 10억원 정도가 금년부터 지원된다.
시민 냉담한 반응에 추모사업도 지지부진
남원시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한병옥 집행위원장은 경남도민일보와 전화통화에서 “그동안 도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묘소를 다듬어 놓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 지원을 통해 3년
계획으로 사업을 올해부터 진행하게 됐다”며 “이는 사업회의 노력도 있지만 정치권에서 애를 썼고 특히 도와 시 공무원이 힘쓴 결과”라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마산에서 김주열 열사가 잊히고 있는 것 같다는 말에 “3·15 당시 김주열 열사와 함께 순국한 열사들이 여러
분 계시고 그분들의 희생도 값진 것이었고 만일 열사가 다른 분들과 같이 시위 현장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면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하지만 열사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지 않았다면 3·15의거는 용공분자의 난동으로 정리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마산에는 신포동 대한통운 앞에 있는 열사의 시신 인양지 표지판과 마산용마고(옛 마산상고) 교정에 있는 흉상에서 열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표지판은 열사추모사업회와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 흉상은 역시 추모사업회와 열사의 용마고 37회 동기들이 돈을 모아 건립했다. 여기에 정부나
자치단체의 지원은 없었다.
묘소 성역화·생가 복원하는 남원과 대조
특히 추모사업회는 지난 2001년과
2002년 마산에 각각 ‘김주열 거리’와 ‘김주열로’를 제정하자며 마산시의회에 청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산시는 3·15관련단체들이
반대한다며 이를 반려했다. 당시 3·15관련단체들은 반대 이유로 “3·15 항쟁 때 목숨을 잃은 열사가 12명이나 돼 한 열사를 지칭해 거리
이름을 제정하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추모회가 추진하던 경남데파트 앞 추모 표지석 설치도 같은 이유로 좌절 됐다.
당시 표지석 설치 등을 청원했던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김영만 공동대표는 “김주열 거리와 김주열로 등은 마산시와 3·15관련단체들의 반발 정서로 인해 계속 추진하기가 부적합
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생각을 안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주열 열사 46주기. ‘마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신화를
만들어 준 김주열 열사를 기리는 인양 표지판은 지금 어떤 차가 들이받아 손상돼 있다.
‘마산의 아들’ 김주열의 이름도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초라하게 ‘찌그러져’ 있다.
‘마산의 아들’ 김주열 열사는 누구인가
가난한 집안위해 은행원 꿈꾸던 소년
김주열 열사가 마산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올해로 46주기를 맞는 김주열 열사는 3·15의거와 4·19혁명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마산시민들은 ‘마산의 아들’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열사가 태어난 곳이 전라북도 남원이며 당시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증을 받기 위해 나섰다가 시위에
참가하게 됐다는 것 등은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주열 평전>을 쓴 소설가 전성태는 책 머리말에서 김주열
열사에 대해 “4·19혁명과 관련한 그의 사회역사적 평가는 과잉되어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꿈을 꾸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며 “김주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았으나 정작 김주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밝혔다.
김주열 열사는 1944년
가을 남원시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천석꾼으로 불리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 장가 안 간 삼촌이
둘이나 되었으며 손위로 누나 둘과 형이 한 명 있었으며 이후 아래로 남동생이 둘 더 생겼다.
아버지 김재계씨와 어머니 권찬주씨는
둘다 보통학교를 졸업해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열사가 중학교에 입학 할 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드러눕자 집안이 서서히
기울어 갔다.
애초 열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이 힘들다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포기하고 남원농고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열사는 다시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지만 낙방했다.
열사는 당시 아는 형이던 하용웅의 권유에 따라 마산상고에 원서를
내게 된다. 은행원이 되어 집안도 일으키고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계속하기 위해서다.
1960년 3월 15일 열사는 마산상고에
합격자 발표를 보러 집을 나섰다가 의거에 참가하게 된다. 열사가 실종 된 후 열사의 형 김광렬씨가 합격증을 대신 받았다.
이 후
열사는 1995년 4월 모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고 마산상고의 동문이 됐다.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매년 3월 15일과 4월 19일이 되면 김주열 열사의 이름이 기념행사장에서나마 거론되지만
정작 열사의 죽음을 혁명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이름은 듣기 힘들다.
권 여사는 열사가 실종된 뒤 마산 시내를
떠돌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 이를 통해 ‘김주열’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마산시민들은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이 떠오르자 권 여사가 애타게 찾던 그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는 곧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나는 시체를 못 받겠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한테 갖다 주시오!”
1960년 4월 11일 오전 10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3월 15일
시위 때 실종됐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다.
경찰은 3일 뒤 시신을 빼돌린 뒤 전라북도 남원 고향집에
있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에게 시신 인수증을 내밀자 여사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했다. 이는 당시 자유당의 서슬에 눌려 험악하던 세상 분위기 속에서 아무나 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김주열 열사가 제 2차 마산의거를 일으키고 이것이 4·19혁명으로 연결된 것은 모두 권 여사 때문이라고 말한다.1960년 3월 15일 당일
실종된 사람은 모두 5명. 이 중 4명은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단 한명 김주열 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권 여사는 그길로
마산으로 향했다. 당시 마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다.
권 여사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기 까지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며 온 마산을 들쑤셔 놓았다. 특히 시청 앞 연못의 물을 다 퍼낸 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닌 것은
마산 시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이 때문에 당시 마산에서 ‘김주열’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특히 시신을 경찰이 바다에 유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마산이 분노로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결국 2차 마산의거와 이후의 4·19혁명의 근간을 권찬주 여사가 온
마산을 헤매며 닦아 놓은 것이다.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4월 11일은 권 여사가 아들 찾기를 포기하고 그 남원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이후 권 여사는 두 번이나 마산시민 앞으로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열사가 죽은 그해 5월 8일 권 여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자식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중략)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식은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겁니다. 마산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CBS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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