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서울 연희동 자택 응접실에 서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기자가 들어서자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맞았다는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물론 이전의 노 전 대통령은 아니었다. 전립선 수술과 투약 때문에 지팡이를 짚거나 보행보조대를 짚지 않으면 걷거나 일어서지 못했다. 가끔씩 손이 떨리고, 말도 어눌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던지는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말을 천천히 씹어가듯 하면서 답변했다. 발음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으면 쉬엄쉬엄 답을 하려 무진 애썼다. 스트라이프(줄무늬) 패턴의 콤비 상의에 행커치프(손수건)와 페이즐리 무늬의 넥타이로 멋을 낸 노 전 대통령의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6·29 20주년을 이틀 앞둔 27일 오전 김민배 정치부장이 노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중앙일간지 인터뷰는 처음이다. 40여분의 직접 대면 인터뷰와 함께, 일부는 노 전 대통령의 구술을 받은 서면 인터뷰로 보완했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오늘 내일 한다’는 소문까지 나돈다는데 아직 갈 때는 아닙니다(웃음). 전립선이 좋지 않아 몇 년 전 수술을 받았고, 혈압 불안정 증세까지 생겨 걷는 것이 불편합니다. ‘나잇값’(우리 나이로 75세)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신문과 책을 읽고, 찾아오는 사람을 만납니다. 밖에 나다니지 않다 보니 건강 악화설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직접 발표했던 6·29 선언이 20주년을 맞았습니다. 6·29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실천 시대를 열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근엔 ‘6월 항쟁’ 얘기만 떠들썩하고 ‘6·29 선언’이라는 말 자체를 들어보기조차 힘들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6·10에서 6·29까지 20일 동안 권력 내부에서 격변도 많았습니다. 군대 동원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민주주의의 회복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국민들의 희생은 말할 것도 없고…. 6·10항쟁은 민주화의 요구였고 투쟁이었습니다. 반면 6·29선언은 민주화의 제도화와 실천이었습니다. 6·10항쟁과 6·29선언이 지난 20년간 민주화에 있어서 두 개의 동테(바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지금은 6·10항쟁이라는 한쪽 동테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4·13 호헌(護憲) 조치 입장에서 6·29까지 2개월 보름 동안 당시 집권측의 정국 대응방식은 180도 돌변했습니다. 민심을 수용한 결과입니까. 민주화 세력에 대한 굴복입니까.
“당시 청와대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군 출동 직전 단계인 ‘출동 준비’ 지시를 내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6월 18일 자정에 전두환 대통령이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위수령 발동을 전제로 한, 군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라인에 있는 이기백 국방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 치안본부장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不可)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군이 출동하면 서울올림픽을 치르지 못하게 된다는 부담감도 컸습니다.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은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요. 다행히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군 출동을 유보시켰습니다. 파국을 면한 것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 민심을 읽고 최악의 강경책을 유보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29 선언의 핵심인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놓고, 노 전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상은 무엇입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 얘기를 꺼낸 것은 6월 24일입니다. 그날 오후 7시쯤 청와대로 올라가 얘기를 나누던 중 전 대통령이 불쑥 ‘당의 신뢰도나 노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라고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옳지!’ 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론 ‘어렵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부정적으로 반문했습니다.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의 반어법(反語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에서 내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것 같습니다. 1987년에 들어서서 나는 줄곧 여러 사람으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갖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아가고 있었습니다.”
―6·29의 주역이 누구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6월 24일 저녁 상황만을 보면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제안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29의 핵심인 직선제와 김대중씨 사면·복권은 어느 한 사람만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내게 직선제를 건의했다느니, 김복동씨가 나를 설득했다느니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6·29선언은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것들이었고, 나만의 아이디어도, 어느 누구의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직선제를 내게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은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후에 외교안보수석)입니다. 1987년 초 우리 집에 새해 인사하러 와서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김대중씨를 사면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6공(共)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6·29선언을 통해 민주화 시대를 열었고, 언론자유를 뿌리내리게 하고 한·중 수교 등 북방정책 수행, ‘남북기본합의서’ 채택한 것 등은 평가 받을 대목이라고 봅니다.”
―임기 막판 김영삼 전 대통령을 민자당 후보로 하는 문제를 놓고 적잖은 논란이 벌어졌었는데….
“허허…. 다음 기회에 얘기합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역사 바로세우기’와 ‘비자금 사건’을 명분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습니다. 지금껏 비자금 사건에 대해 한 번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는데요.
“비자금 문제로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다는 점에 대해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엔 변함 없습니다.”
―세간에선 노 전 대통령께서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려 했느냐를 궁금해합니다. 또 추징금 2629억원 중 지금까지 2113억원(80.38%)을 환수당했습니다.
“비자금 문제에 대해 머지않아 보다 소상하게 역사와 국민 앞에 밝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내게 있었던 정치자금은 모두 은행과 몇몇 기업에 맡겨져 있었고, 돈을 맡았던 일부 기업의 부도로 회수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국고로 환수된 것으로 압니다.”
―재임 중 ‘물태우’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일부에선 국가 공권력에 대한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노태우 정부 때부터 아닌가 하는 얘기도 합니다.
“권위주의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용수철처럼 일어난 욕구를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만히 두면 시간이 흐르면서 강도가 약해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덕분에 민주주의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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