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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고집스런 게처럼 날 잡아줘 고마워”

CKwon 2006. 9. 15. 22:32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알랭 비르콩들레/이미지박스

비행과 여자,그리고 문학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감수성이 바늘끝처럼 예민한 이 작가를 높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올해로 출간 60주년을 맞은 ‘어린 왕자’의 작가 앙투안 생텍쥐페리(1900∼1944)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16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모두 8000만부가 팔린 ‘어린 왕자’는 왜 성경,자본론에 이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었을까. 그것은 생텍쥐페리가 우리에게 길 잃은 앨버트로스의 이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슬픔과 사랑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한 마리 새 앨버트로스. 생텍쥐페리는 땅 위에서 끝까지 머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1929년 발표한 처녀작 ‘남방 우편기’의 주인공은 사막의 모래 언덕 위에서 죽는다. 소설속에서 유족에게 전달된 전보는 간결하고 차갑다. “비행사 사망. 비행기 기체는 손상 없음. stop.”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처럼 사라졌다. 삶의 낮은 차원을 견디는데 서툴렀던 이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생텍쥐페리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행방불명 되기 전부터,그리고 행방불명 된 이후로도 그가 돌아오기만을 한결같이 기다리던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항공우편회사 지사장이던 생텍쥐페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7세의 과부 콘수엘로를 만난 것은 시민 혁명의 기운이 돌고 있던 1930년 9월이었다. 엘살바르도의 7대 부호 가문 출신인 콘수엘로는 17세에 미국 유학을 가서 첫 남편을 만났지만 2년만에 사별하고 파리 사교계에 진출,과테말라 출신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고메스 카리요와 재혼한다. 그러나 1년만에 다시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남편의 현금 유산을 찾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렀을 때 생텍쥐페리를 만난다. 사교회장에서 콘수엘로를 처음 만난 생텍쥐페리는 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공중에서 나눈 키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 출신인 생텍쥐페리 집안은 남미 출신의 이혼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히 세기적 방랑벽의 소유자라할 생텍쥐페리는 도망갔다가 돌아오고,또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생텍쥐페리는 문학적 성공을 거둬도,비행 기록을 수립해도,콘수엘로가 곁에 있어도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근원적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혼자서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고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고독 속에서만 사랑이 온전히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언제나 최초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한 1944년 7월,생텍쥐페리는 정찰임무를 띠고 출격했다가 귀환하지 않았다. 실종되기 전,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집스런 작은 게처럼 날 꼭 잡고 있어줘서 고마워.” 남편의 실종을 두고 자살 혹은 탈영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콘수엘로는 모른 척한다. 그녀는 일기에조차 실종에 대해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남편의 귀환 소식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믿었고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연인들이 주고받는 신비한 언어를 믿었다. 생텍쥐페리의 사망이 공식으로 발표되지 않은 관계로 그녀는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지만 남편의 수많은 흉상을 만들어 어루만지고 키스를 퍼부었다. 1979년 천식발작으로 죽음을 맞은 그녀는 두번째 남편 카리요 무덤 옆에 묻힌다. 그녀는 두번이나 잊혀진 여인이 되었지만 ‘어린 왕자’ 출간 60주년을 맞아 그녀의 사랑은 비로소 복권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의 커다란 여행 가방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뉴욕에서 파리로 가는 배에 실려 돌아왔지만 그 가방의 내용물이 공개된 것은 프랑스에서 이 책이 출간된 지난해 였다. 가방속에는 부부의 사랑이 담긴 편지,서류,수채화,쪽지,스케치북,자필 원고,시 등이 들어 있었다. 전기작가 알랭 비르콩들레가 그 자료를 제공받아 쓴 이 책은 한국을 비롯,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11개국에서 동시 번역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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