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축제로' 대중 사로잡은 오바마 연설
사실 정치인의 연설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 제대로 들어보겠다고 작심하지 않는 이상 연설이 끝나기 전에 TV 채널이 돌아가기 일쑤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선 정치 연설이 유권자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인 버락 오바마가 만들어낸 '오바마 현상'의 하나다.
네티즌들은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C0%AF%C6%A9%BA%EA&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유튜브(YouTube)'에서 오바마 연설 동영상을 스스로 찾아보며 그의 탁월한 언변에 환호하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2770여개의 오바마 연설 동영상은 각 게시물마다 적게는 1만여 건, 많게는 100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새로운 대중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학자들은 고전적인 대중 연설의 영향력은 급속히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연설은 죽지 않았다. 미국 CBS 방송이 지적한대로 "미디어가 아무리 발달해도 연설자와 청중이 직접 소통하는 면대면(面對面) 커뮤니케이션을 대체할 만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21세기에도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대중 연설은 정치 권력 획득의 유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오바마를 키운 연설
2004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정치인들이 3박4일 동안 무대를 오르내리며 당원들에게 연설하는 행사다. 버락 오바마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C0%CF%B8%AE%B3%EB%C0%CC%C1%D6&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청중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날의 수많은 연설자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청중들은 의례적인 박수와 침묵으로 이 정치 신인을 맞이했다.
객석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연설 중반부터였다. 간간이 박수가 터져나오더니, 일부 청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립 박수의 빈도는 점점 잦아졌고, 연설이 끝날 무렵 행사장의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다. 18분 전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오바마는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어 무대에서 내려왔다. '벼락 스타'의 탄생이었다.
지난 1월부터 실시 중인 대선 후보 선출 예비선거(프라이머리)에서도 연설은 오바마 특유의 무기가 되고 있다. 연설로는 경쟁자인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C8%FA%B7%AF%B8%AE+%C5%AC%B8%B0%C5%CF&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한참 앞질렀다. 검색 엔진 '구글'에서 네티즌들이 힐러리의 연설을 찾아본 횟수는 약 245만4000번이다. 반면 오바마 연설은 '오바마 연설' '오바마 연설 원고' '오바마 연설 MP3' 등 다양한 검색어로 약 707만8500회 검색됐다. 힐러리보다 3배 정도 많은 표를 얻은 셈이다.
오바마의 연설이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유는 내용(연설문)과 형식(전달력) 면에서 좋은 연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바마는 개인적인 경험을 연설의 소재로 즐겨 사용한다. '미국은 희망의 땅'이라는 내용을 말할 때 케냐 이민 3세인 자신도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는 식이다.
"부모님은 저에게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주셨습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선 이런 이름도 성공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밤 그들이 저를 자랑스럽게 내려다 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2004년 전당대회)
이처럼 연설의 내용이 말하는 이의 정체성과 일치할 때 청중은 연설자에게서 진정성과 호감을 느낀다. 오바마는 또 정책을 소개하기보다 비전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핵심어는 '변화' '희망' 등이다.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한 적이 없는 젊은 미국인들이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투표율로 선거에 참여했을 땐, 미국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략) 부유하든 가난하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히스패닉이든 아시아인이든, 우리는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변화, 이것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1월8일 뉴햄프셔 예비선거)
이는 힐러리가 정책을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나열한다는 것과 다른 점이다. 이 탓에 '오바마 연설은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군중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오바마 스타일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을 지냈던 마이클 거슨은 지난 1월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힐러리는 정책의 대가이고 매우 박식하다"면서도 "(힐러리의 연설 방식은) 듣는 이에게 반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시적인 운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안다는 것도 오바마의 장점이다. 그는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문장을 연이어 여러 번 말하는 기법을 즐겨 쓴다. 뉴햄프셔 연설에선 마지막 3분 동안 '우리는 ~을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무려 12회 반복했다.
오바마의 연설이 빚어내는 리듬감은 음악인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그룹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A%ED%B7%A2+%BE%C6%C0%CC%B5%E5+%C7%C7%BD%BA&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블랙 아이드 피스'의 윌 아이 엠과 R & B 가수 존 레전드, 배우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D%BA%C4%AE%B7%BF+%BF%E4%C7%D1%BD%BC&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스칼렛 요한슨 등 오바마를 지지하는 스타들이 뉴햄프셔 연설에 곡을 붙여 뮤직비디오 'Yes, we can(예스 위 캔)'(www.youtube.com/watch?v=jjXyqcx-mYY)을 만들었다. 이 비디오에서 스타들이 부르는 노래는 오바마의 실제 연설과 동일한 박자로 나란히 진행된다. 오바마의 연설 자체가 음악적이라는 얘기다.
오바마 연설의 이 같은 흡인력은 젊은 유권자들을 정치와 선거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바마니아(오바마와 마니아의 합성어)'들은 예비 선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오바마가 연설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연설이 대통령 선거를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설이 선거를 축제로 바꾼다
미국 연설문화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에는 연설이 바로 정치였다. '연설가'와 '정치가'라는 말이 구별되어 쓰이지 않았다. 공동체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 모두 연설과 토론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당시엔 연설을 잘하는 사람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인으로 인정 받았다. 이 때문에 로마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연설과 논쟁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수사학 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정치는 자유로운 교양 시민들의 말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이 때의 관념은 오늘날 서구 민주정치의 사상적 뿌리가 됐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연설을 하나씩은 갖고 있다거나, 오바마가 연설 하나로 스타가 된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연설문화가 활성화돼 있다 보니 연설과 관련된 직업도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그중에서도 정치인의 연설 담당 비서관(Speech writer)은 선거 운동의 핵심 참모로 대접 받는다. 잘 만든 연설 한편이 선거의 흐름을 바꾸고 승패를 좌우할 수 있어서다. 후보에 대한 발언권도 강하다.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는지, 연설 비서관이 일일이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이 연설 원고에 없던 발언을 해서 정부 관계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하는데 미국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2년 국정연설에서 언급했던 '악의 축' 표현도 언뜻 돌발 발언처럼 들리지만 실은 연설 비서관이 고심 끝에 만든 조어다.
오바마 캠프에도 연설 비서관 3명으로 구성된 연설팀이 있다. 팀장은 26세의 존 패브루.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존 케리 캠프 출신이다. 2005년부터 오바마와 함께 일한 패브루는 오바마 입에 착 붙는 문장을 써내기 위해 그가 하는 말을 모두 받아적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패브루는 오바마 고유의 특징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다. 그의 아이디어를 오바마식 화법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됐다. 팀워크를 토대로 탄생한 오바마의 연설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패브루도 유명해졌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그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처럼 명연설문을 작성해 이름을 날린 연설 비서관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테오도어 소렌슨이 대표적이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취임 연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케네디는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소렌슨의 능력을 높이 샀다. 소렌슨은 당초 케네디의 특별 자문을 겸임하며 국내 문제에 대해 조언했으나, 후일 케네디의 요청으로 외교 현안에도 개입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게 된다.
텔레비전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한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7%CE%B3%CE%B5%E5+%B7%B9%C0%CC%B0%C7&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은 페기 누넌이라는 여성이었다. 누넌은 1984년 레이건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며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도 일했다. 아버지 부시가 1988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선보여 인기를 끌었던 표현 "나를 믿으세요.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Read my lips: No new taxes)"가 누넌의 작품이다.
연설 평론이 활발하다는 것도 미국 연설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언론이 연설을 꼼꼼히 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인의 발언만 연구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정치 지도자가 연설을 하면 곧바로 평론이 쏟아져나온다.
그러나 이와 달리 우리의 공적인 말하기 문화는 척박하다. 일단 선거 후보나 정치 지도자가 유권자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미국처럼 흔하지 않다. 정당별 경선 과정에선 합동연설회가 실시되지만, 본선에선 방송 연설의 비중이 더 크다. 현행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0%F8%C1%F7%BC%B1%B0%C5%B9%FD&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공직선거법은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등의 부작용을 이유로 대규모 옥외 합동연설회를 금지하고 있다.
TV로 보는 연설과 현장에서 보는 연설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상철 성균관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는 "선거 캠페인에서 후보자의 연설을 방송으로 몰아넣은 게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도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 과정은 본래 유권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축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후보와 유권자의 직접 소통 기회가 차단되면서 이 같은 기능이 상당 부분 축소됐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어떤 매체를 통해 말할 것인가는 차라리 부차적인 얘기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 정치에도 말 잘하는 사람은 있었다. 다만 품격 있는 말하기가 아니라, 상대를 비난하는 저급한 수사만 발달했다는 게 문제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도 '입만 살아있는' 사람은 훌륭한 연설가로 존경받지 못했다. 서울대 협동과정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q=%BC%AD%BE%E7%B0%ED%C0%FC%C7%D0&nil_profile=newskwd&nil_id=v20080319155507127" target=new>서양고전학과 강사 안재원 박사는 "고대 로마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최선을 다하는 정치가이자, 말을 할 때는 자리와 주제에 맞게 절제와 품위를 지킬 줄 아는 교양인'을 이상적 연설가로 꼽았다"고 설명했다. 머지않아 4월 총선의 선거 운동이 본격화된다. 정치인들의 말이 쏟아질 것이다. 유권자들은 미국이 부럽지 않은, '이상적 연설가'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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